못 그린 그림은 왜 웃긴가 — 실패가 유머가 되는 조건

누군가 친구를 완벽하게 그려내면 사람들은 감탄한다. 그런데 눈이 짝짝이에 코가 실종된 그림이 나오면 단체 대화방이 뒤집어진다. 잘한 것보다 망한 것이 더 큰 반응을 얻는 이 현상은 우연이 아니다. 유머를 설명하는 이론들은 실패가 웃음이 되는 조건을 꽤 구체적으로 짚어낸다.

기대와 결과가 어긋날 때

유머를 설명하는 오래된 틀 중 하나가 부조화 해소 이론이다.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결과를 예측하는데, 실제 결과가 그 예측과 어긋나면 부조화가 발생한다. 이 어긋남을 알아채고 나름의 방식으로 납득하는 과정에서 웃음이 나온다는 설명이다.

그림에 이 틀을 적용하면 이렇게 된다. 우리는 사람 얼굴을 그린 그림을 볼 때 사람 얼굴처럼 생긴 것을 기대한다. 그런데 눈앞의 그림은 분명 얼굴을 의도했는데 얼굴이 아니다. 완전히 추상적인 낙서였다면 애초에 얼굴을 기대하지 않았을 테니 부조화도 없다. 얼굴을 그리려 했다는 의도가 명백한데 결과가 어긋나 있을 때 비로소 웃음이 발생한다.

어긋남만으로는 부족하다

다만 이 설명에는 구멍이 있다. 세상에는 예측과 어긋나지만 전혀 웃기지 않은 일이 훨씬 많다. 갑작스러운 사고나 나쁜 소식도 기대를 배반하지만 아무도 웃지 않는다. 어긋남 자체는 유머의 필요조건일 수는 있어도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뜻이다.

이 지점을 보완하는 것이 무해한 위반 이론이다. 이 이론에 따르면 유머는 두 가지가 동시에 성립할 때 발생한다. 어떤 규범이나 기대가 위반돼야 하고, 동시에 그 위반이 괜찮다고 느껴져야 한다. 위반만 있으면 불쾌하고, 괜찮기만 하면 지루하다. 둘이 겹치는 좁은 영역에서만 웃음이 나온다.

흥미롭게도 한 연구에서는 실패할 것이라고 미리 예상한 상황에서조차 실제 실패를 봤을 때 성공을 봤을 때보다 더 큰 웃음이 나왔다는 결과가 보고됐다. 놀라움이 유머의 핵심이라면 예상된 실패는 덜 웃겨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. 실패 자체가 무해한 위반의 조건을 충족하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.

무해함을 만드는 장치들

이 틀로 보면 몽타주 챌린지에서 웃음이 나오는 구조가 분명해진다. 위반은 확실하다. 얼굴을 그린다고 했는데 얼굴이 아닌 것이 나온다. 문제는 이 위반을 무해하게 만드는 부분인데, 여기에 몇 가지 장치가 작동한다.

우선 30초라는 제한 시간이 있다. 시간이 없었으니 못 그린 게 당연하다는 핑계가 처음부터 제공되는 셈이다. 실력이 아니라 조건 탓으로 돌릴 수 있으면 실패는 훨씬 덜 아프다. 그리고 모두가 똑같이 망한다는 점도 중요하다. 나만 못 그리면 창피하지만 다 같이 못 그리면 그냥 웃긴 상황이 된다.

판정을 사람이 아니라 AI가 한다는 점도 같은 방향으로 작용한다. 친구가 직접 점수를 매기고 놀리면 관계에 감정이 남을 수 있지만, AI가 내린 판정은 누구의 악의도 아닌 것이 된다. 놀림의 화살이 사람에게 향하지 않도록 완충 장치를 둔 셈이다.

웃음의 대상이 바뀌면 무너진다

반대로 이 구조는 쉽게 깨질 수도 있다. 무해함이 사라지는 순간 같은 상황이 불쾌해지기 때문이다. 그림 실력을 웃는 것과 사진 속 인물의 외모를 웃는 것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. 전자는 스스로 선택해 참여한 놀이의 결과지만, 후자는 당사자가 선택한 적 없는 것에 대한 평가다. 후자로 넘어가는 순간 위반은 더 이상 무해하지 않다.

몽타주 챌린지의 AI 촌평이 그림 실력만 언급하고 사진 속 인물의 외모는 절대 다루지 않도록 설계된 것은 이 경계를 지키기 위해서다. 관련해서 지켜야 할 선은 초상권 문서에서 더 구체적으로 다룬다.

실패를 전제로 설계된 놀이

일반적인 게임은 잘하는 사람에게 보상을 준다. 이 게임은 반대에 가깝다. 높은 점수를 받은 그림보다 처참하게 망한 그림이 더 활발히 공유되고 더 많은 반응을 얻는다. 애초에 사람이 기억만으로 얼굴을 그리는 데 실패하도록 설계된 구조이기 때문에, 실패는 예외가 아니라 기본값이다.

왜 그 실패가 거의 필연적인지는 얼굴 기억의 과학에서 다룬다. 잘 그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점을 받아들이면 이 게임은 훨씬 편해진다. 낮은 점수는 잘못된 결과가 아니라 의도된 재료다.